걷기와 독서가 만나는 제주 여행
한라산은 정상만큼이나 둘레가 아름다운 산입니다. 해발 1,000m 안팎을 도는 한라산 둘레길은 총 80여km에 이르는 길로, 숲과 마을, 밭담과 오름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많은 여행자가 간과하는 건, 이 길 위에 ‘책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둘레길의 사계절 풍경과 함께 호흡하는 독립서점들이죠.
이번 여행에서는 한라산 둘레길 코스를 걷다 마주한 네 곳의 독립서점을 소개하려 합니다. 각각의 책방은 제주의 다른 풍경을 담고 있었고,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숲 냄새와 바람 소리가 배어들었습니다.
1. 어승생 둘레길 — ‘숲과책방 느린숨’
둘레길 중 어승생 구간은 울창한 삼나무 숲과 곶자왈 지대가 이어집니다. 바람이 불면 나무 꼭대기에서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납니다. ‘숲과책방 느린숨’은 바로 이 구간 입구의 작은 마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점 앞마당에는 야생화를 심어두었고, 작은 평상 두 개가 놓여 있습니다. 문을 열면 나무 향과 종이 냄새가 함께 스며듭니다. 내부는 크지 않지만,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인상적입니다. 주인은 “둘레길 걷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책 구성은 숲과 자연, 걷기, 마음챙김을 주제로 한 책들이 중심입니다. 이날 저는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꺼내 들었는데, 그의 문장 속 ‘걷는 사람의 생각’이 이 숲길과 묘하게 겹쳤습니다. 책방 한쪽엔 ‘오늘의 문장’이라는 작은 칠판이 있었고, 그날 적힌 글귀는 이랬습니다.
“천천히 숨 쉬어라. 그게 숲이 하는 말이다.”
2. 남조로 둘레길 — ‘달빛책방 남쪽마을’
남조로 둘레길은 제주에서 가장 평탄하면서도 초록이 짙은 구간 중 하나입니다. 넓은 목초지와 유채꽃밭,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붉게 물드는 하늘이 이어집니다. ‘달빛책방 남쪽마을’은 이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습니다.
겉모습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듯 고즈넉합니다. 문간에 걸린 작은 종을 울리며 들어서면,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 있습니다. 안쪽은 두 개의 방을 트고 책장과 테이블, 좌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곳의 특징은 ‘밤에도 문을 연다’는 점입니다. 둘레길 여행자들은 주로 낮에 걷지만, 이 책방은 야간에도 운영해 별빛과 달빛을 벗 삼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달과 별을 주제로 한 그림책과 시집을 추천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었는데, 시 속 느릿한 호흡이 달빛 아래에서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3. 1100고지 둘레길 — ‘고지의 서재’
1100고지 인근은 한라산 둘레길 중에서도 가장 시원하고, 구름이 자주 걸리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고지의 서재’는 이름 그대로 해발 1,000m 부근에 있는 책방입니다.
외벽은 돌담을 그대로 살렸고, 안으로 들어가면 창밖에 안개 낀 숲이 그림처럼 걸려 있습니다. 여름에도 선선해, 책 읽기엔 최고의 장소입니다. 책장은 기후 변화, 환경, 인문학 서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쪽에 작은 난로와 의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고지에서 책을 읽으면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어도, 밖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었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둘레길 여정과 겹쳐, 책 속 길과 실제 길이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4. 동백길 둘레길 — ‘동백책방’
겨울, 한라산 남사면의 동백길은 붉은 꽃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 구간에 자리한 ‘동백책방’은 겨울이 되면 더 빛나는 공간입니다. 문 앞엔 동백꽃이 가득 깔린 작은 마당이 있고, 나무로 된 현판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내부는 책과 함께 동백차, 유자차를 즐길 수 있는 북카페 형태입니다. 주인은 “겨울에만 오는 손님이 절반”이라며 웃었습니다. 책장은 계절 에세이, 사진집, 그리고 제주 식물 도감 등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겨울에는 특히 꽃과 나무를 주제로 한 책이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마신 동백꽃차는 향이 은은했고, 창밖 풍경과 잘 어울렸습니다. 책방 한쪽엔 ‘동백 사진첩’이 있어, 손님들이 찍은 동백꽃 사진을 자유롭게 붙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한라산 둘레길 책방 여행 팁
- 시간 여유를 두고
둘레길과 책방을 함께 즐기려면 하루에 1~2개 구간만 걷는 것이 좋습니다. 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 시즌별로 다른 책방 분위기
봄엔 숲과 들꽃, 여름엔 바람, 가을엔 억새와 하늘, 겨울엔 동백과 눈. 계절에 따라 책방 창밖 풍경이 달라집니다. - 책방지기와 대화하기
대부분의 독립서점 주인은 제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분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책만큼 흥미롭습니다.
걷기와 책 읽기, 두 개의 호흡
한라산 둘레길에서 책방을 찾는 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의 리듬을 조율하는 방법입니다. 걷기와 책 읽기는 모두 호흡을 길게 하고, 시선을 깊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숲과 마을, 그리고 책방 사이를 오가다 보면, 발걸음뿐 아니라 마음도 차분해집니다.
한라산 둘레길은 앞으로도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의 작은 책방들은 그 변화 속에서 늘 같은 자리에서 여행자를 맞이할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창문을 열어두고, 비 오는 날이면 난로를 피우고, 눈 오는 날이면 따뜻한 차를 끓이며 말이죠.
그 길을 다시 걸을 때, 또 어떤 책방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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