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코스별로 들르는 독립서점 여행
제주는 자동차로도, 버스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지만, 진짜 제주의 결은 걷는 발걸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걷다 보면 바다와 하늘의 색이 시간마다 변하고, 길가의 귤나무 잎사귀에 묻은 햇빛조차 유심히 보게 되죠. 이번 여행은 올레길을 코스로 잡았지만, 단순히 ‘완주’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책방을 발견하는 순간이 여행의 중심이었습니다.
7코스 — 서귀동 책방, 노을빛에 물드는 창가
아침 9시,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근처에서 올레길 표식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10월의 제주 공기는 상쾌했고, 바다는 은빛으로 잔잔했습니다. 발걸음이 법환포구로 가까워질수록, 바닷바람 속에 소금기와 해초 냄새가 섞여 들어왔습니다.
포구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은 돌담과 하얀 집들이 이어지고, 그 중 한 건물 2층에 나무 간판이 걸린 책방이 있었습니다. ‘서귀동 책방’.
문을 열자 부드러운 재즈 음악과 함께 은은한 원두향이 퍼졌습니다. 창가 너머로 오후 햇살이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습니다. 작은 원목 책상 위에는 ‘제주 시인’ 코너가 있었는데, 한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시 속의 바다는 창밖 풍경과 완벽하게 겹쳤습니다.
“이 시집이 오늘 바다 색이랑 잘 어울릴 거예요.”
책방 주인이 건넨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날 저녁, 창밖 노을이 주황에서 보라로 변할 때까지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5코스 — 협재북스, 비양도를 마주한 오후
한림항에서 출발해 금능해수욕장을 지나 협재로 향했습니다. 모래가 발목까지 푹 빠지는 해변을 걸으며, 바닷물은 유리처럼 투명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비양도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해변 중앙에서 골목으로 2분쯤 들어서면 작은 나무문과 손글씨 간판이 보입니다. ‘협재북스’. 문을 열면 한쪽 벽은 소설과 여행서, 다른 한쪽 벽은 사진집과 디자인 서적이 가득합니다. 창가 자리에 앉자 비양도가 정면에 들어왔습니다.
아이스라떼를 마시며 ‘바다와 섬에 관한 짧은 글’을 읽는데, 문장 속 파도 소리가 창밖의 파도와 겹쳤습니다. 옆자리 커플이 방명록에 “우린 여기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쓰는 걸 보며, 이 책방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5코스 — 남원책방, 마을의 기억을 담다
남원포구를 출발해 해안을 따라 걷는 길에는 바위 사이로 파도가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남겼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돌담길을 돌아서니, ‘남원책방’이라는 작은 현판이 보였습니다.
이 책방의 절반은 마을 주민들이 기증한 책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오래된 제주 방언 사전, 빛바랜 소설책, 마을의 옛 사진집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다 한 할머니가 들어와 “이 책은 내가 젊을 때 읽던 거야”라며 웃었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순간 책이 사람을 이어주는 힘을 느꼈습니다.
책방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누그러지고, 바람이 한결 시원했습니다.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방금 들은 마을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울렸습니다.
1코스 — 성산책방 바람결, 바다와 환경을 읽다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광치기 해변에 도착하니 성산일출봉이 장엄하게 서 있었습니다. 길 옆에 있는 ‘성산책방 바람결’은 통유리 창이 바다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곳은 해양 환경 서적이 많았습니다. 섬과 바다를 지키는 법, 파도의 시간 같은 제목들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파도 소리를 듣는 시간은, 책 속 내용이 현실과 섞이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책방 주인은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바다를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10코스 — 모슬포해안책방, 재즈와 파도의 콜라보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모슬포항까지 걷는 길은 바다와 오름, 작은 마을이 번갈아 나옵니다.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모슬포해안책방’**은 나무문을 열면 재즈가 흐르고, 벽에는 흑백 바다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창가에 앉으면 낚시꾼들의 그림자가 바다 위에 드리워지고,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책방지기는 직접 인화한 바다 사진 엽서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저는 한 장을 골라 책 속에 끼워두었습니다. 그 엽서는 여행이 끝난 후에도 제주 바다를 떠올리게 할 작은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14코스 — 저지책다방, 예술과 책이 만나는 공간
저지리는 제주 현대미술관이 있는 예술마을입니다. 미술관을 둘러본 후 골목 끝에 있는 **‘저지책다방’**에 들어갔습니다. 미술과 디자인 서적이 많았고, 테이블마다 색연필과 스케치북이 놓여 있어 손님들이 차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책과 그림이 한 페이지에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걷기와 자전거 팁
올레길을 완주하기 힘들다면, 책방이 있는 구간만 자전거로 연결하는 것도 좋습니다. 7코스와 15코스는 자전거 대여소가 가까워 이동이 편합니다. 다만 일부 해안도로는 바람이 강하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여행 팁
- 책방은 운영 시간이 유동적이니 SNS 확인 필수
- 제주 로컬 작가의 책과 굿즈는 기념품으로 추천
- 책방마다 있는 방명록에 꼭 한 줄 남겨두기
- 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티 북카페는 오후 3시 이후가 한산
이렇게 올레길의 여섯 구간에서 만난 책방들은, 각각 다른 빛과 향기, 그리고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바다와 책을 함께 만난 경험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의 축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소중한 추억의 축적 되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